(할머님은 아양교 밑에서 강물에 뿌렸고 어머님은 산비탈에 새 먹이로 뿌렸다. 산바탈에서 내려다 본 아양교 주변 모습)
조선시대의 상장례가 전공인 국립민속박물관의 정종수 과장(유물과학과)은 그의 저서인 <사람의 한평생>(학고재 펴냄)에서 “매장이고 납골이고 다 부질없는 일이니 화장해. 당신 마음대로 뿌리고 싶은 곳에 뿌려. 흔적을 남기지 말라.”는 유언 아닌 유언을 부인에게 남기고 있다. 한편 창원대학교 김달수 교수(장례지도과)는 화장한 뼛가루를 뿌리는 산골장묘방식이 가장 자연친화적이고 경제적인 장사법이라고 하였다. 서울시는 2007년에 경기도 파주시 용미리 묘지내에 산골공원인 추모의 숲을 마련하고 2020년까지 화장 유골의 산골비율을 60%까지 끌어 올린다는 목표 아래 다양한 시설확충과 홍보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산골이 오래전부터 행해져왔다.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납골이 일반화 되기 전인 1980년대까지만 해도 화장하면 유골을 강이나 산에 뿌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세계적으로도 다양한 산골방식이 있다고 한다. 프랑스 종쉬롤 공원묘지에는 산골장에 고인의 명패를 세울 수 있으며 영국 웨일즈에서는 화장 허가만 받으면 바다를 제외한 어느 곳에나 유골을 뿌릴 수 있으며 일본 요코하마시에서는 아파트, 학교 주위에서 산골장지를 운영하고 있다. 2007년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작성한 <장사문화 발전을 위한 국가전략계획수립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1,00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자신이 사망했을 때에 선호하는 장례방식에 대해 44.7%가 후손이 편한 방법인 자연장을 원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명절 때의 성묘와 고인에 대한 추모가 강한 우리 사회의 장묘문화 때문에 고인의 흔적이 남지 않는 산골은 대중적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나 역시도 산골은 낯선 방식이었다.
내가 직접 경험한 두 번의 장례는 모두 산골이다. 0000년생이신 할머님에게도 산골이 낯선 장례방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구시 산격동에 살 때 할아버지는 여름철에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집밖에서 주무시다가 귀신이 불러서(?) 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다가 죽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가 태어나시기 직전의 일이다. 호적에는 0000년도에 돌아가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결국 묘지가 없다. 아버지 형제분들은 3남 1녀인데 효자로 소문난 제일 큰아버님은 결혼하지 않은 채 몸이 아파서 돌아가셨는데 미혼이라는 이유로 역시 묘지가 없다. 둘째 큰아버님은 6.25전쟁 때 군인으로 참전하셨다가 전사하였다. 따라서 전사연락만 받았기 때문에 역시 묘지가 없다. 막내이며 유복자이신 아버님께서는 젊었을 때부터 할머니와 같이 살지 않았다. 자동차정비기술을 배우고 난 뒤 군대에 지원하여 하사관으로 근무할 때부터 오랫동안 객지생활을 하셨다. 결국 할머님은 객지에 있는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애써서 찾아올 가족이 없을 것이므로 매장이나 납골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같이 사셨던 어머님(고모)과도 자연스럽게 산골을 하기로 의논했던 것이다. 1982년 부산에서 살고 있던 나는, 설날 휴가를 지내기 위해 대구에 왔다. 첫째인 여민이가 태어난 지 백일이 되는 시기였다. 할머님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치매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으며 대명동 어머님께서 모시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며칠 동안 함께 지낸 다음에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곧바로 할머님 사망소식을 듣고 다시 대구로 왔다. 화장을 해서 유골을 망우공원옆의 아양교 다리 밑에서 흐르는 강물에 뿌렸다.
대명동 어머님께서는 일찌감치 수의 등의 장례용품과 묘터를 준비해 두었다. 묘터는 경북 경산시에 있는 백합공원 묘원에 있었다. 같이 사시던 고모부의 묘터를 분양받는 과정에서 함께 준비하신 것 같은데 결국 매장을 포기하시고 산골을 선택하셨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일찍 결혼한 대명동 어머님께서는 아들을 낳긴 했으나 제대로 돌볼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경험한 아들의 죽음은 평생에 지울 수 없는 한이었다. 이내 결혼생활을 포기하고 친정으로 돌아와서 할머니와 남동생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다. 여성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평생 담당하다가 뒤늦게 고모부를 만났으나 제한된 만남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를 키우신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으나 가끔 남동생인 아버님과의 갈등이 심각해지기도 하였다. 내가 부산, 진주에서의 객지생활을 할 때는 혼자 대구시 대명동에서 생활하셨다. 결국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을 하셨고 가족이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산골을 선택하신 것이다. 몸이 불편하실 때마다 찹쌀밥에 뼛가루를 묻혀서 산에 뿌려달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산새들이 먹으면 가장 좋다고도 하였고 화장장에서 뼛가루를 곱게 하는 것이 최고의 정성이라는 점을 강조하셨다. 새처럼 훨훨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산골에 대해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1994년 8월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을 때에, 나는 아무런 주저없이 어머님께서 원하신 산골을 선택하였다. 장소는 할머님과 함께 생활하도록 같은 곳을 선택하였다. 분명히 명절 때에 허전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무엇보다 고인이 평소 원하셨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금호강변에 있는 인터불고호텔과 아양교 사이의 벼랑이다. 이곳에서는 할머님을 산골한 곳이 바로 내려다 보인다. 당시에는 조경시설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냥 야생숲이었다. 그래서 자연 속에서 산골하는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계단식으로 조경이 잘 되어 있어서 갈 때마다 낯설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헤매었으나 가족의 기억을 더듬어서 나름대로 한곳을 정하였다. 우리 가족 4명은 매년 설날과 한가위에 년 2회, 정기적으로 방문한다. 말하자면 우리 식의 성묘인 셈이다. 준비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 같아서 몇 년 전에는 마누라가 정성을 들여서 그릇과 나무상자를 준비하였다. 생전에 좋아하시던 소주와 게맛살을 빠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제는 여민이, 효민이에게도 익숙해진 명절모습이 되었다. 2011년 2월 3일, 설날부터는 음성화일을 준비하였다. 추모식을 할 때 마다 어머님의 음성을 듣는 순서가 있는데 그동안은 생전에 남기신 카셋트 테이프를 이용하여 녹음기로 들었었는데 오래되니까 잡음이 많이 생겼다. 안타깝게 여긴 여민이가 음성화일로 바꾸었다. 금성사에서 만든 낡은 녹음기 대신에 노트북이 등장하였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음성을 듣기도 한다. 신식인 셈이다.
산골이라는 장례방식이 좋기는 한데 명절 때에 고인을 추모하는 데에는 뭔가 모르게 약간 허전한 것 같다. 그래서 추모방식, 사전 준비 등을 조금더 보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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