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말을 미처 삼키지 못하고, 듣는 사람, 지루한 것도 모른 채하면서 3월 22일
퇴임식에서 꽤 길게 해버린 퇴임사. 나름대로는 30년을 돌아본다는 의미였는데....
퇴 임 사
오늘 퇴임식 순서가 너무 과분해서 무슨 말을 해야 될 지 당황스럽습니다. 3주전인 3월 1일부터 사무실에 출근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퇴임이 영 실감나지 않더니만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비로소 실감이 납니다. 며칠 쉬어보니까 정말 섭섭한 생각,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게 <회한(悔恨)>인 것 같습니다. 혼자 있을 때 눈물이 핑 돌더군요. 마산YMCA 이윤기 간사가 미국 가면서 자기 블로그에 올린 글을 어제 읽으면서는 정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물론 제 버릇 남 주겠습니까? 돝섬재생을 위한 남이섬방문, 마을만들기를 위하여 구청별로 순회방문교육등 요즈음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퇴임한다고 창원을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YMCA 상근직을 그만 두는 것 일 뿐이고 새로운 시작입니다. 지역운동에 정년이 있습니까? 그러나 출퇴근하지 않는 게 묘한 기분을 들게 하드군요.
성심성의껏 퇴임식을 준비해주는 후배들을 보면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말씀과 떠나는 사람은 조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오늘도 자기자리에서,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하여 묵묵히 애쓰시는 분들을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입니다. 특히 선배님들께, 후배가 폼만 잡고 오라가라 한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조금전 동영상을 보니까 좋은 것만 있던데 너무 미화시켜 놓은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 제가 혼자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특별히 큰 일을 한 것은 없지만 큰 흠 없이 30년을 지내게 된 것이 감사해서 이렇게 오시게 했습니다. 그래서 바쁘다는 핑계로 평소에 자주 인사드리지 못한 분들께 한꺼번에 인사드릴려고 합니다.
국정, 도정, 시정으로 바쁘신 권경석 국회의원님, 강병기 부지사님, 박완수 시장님께서 함께 자리해주시고 축사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행정과의 관계에서는 밀고 당기면서, 찌지고 뽂으면서 어지간히 정이 든 것 같습니다. 축가순서를 배려해주신 민예총 김유철 회장님, 건축기금마련에 흔쾌히 노력해주신 창원상공회의소 최충경 회장님, 이수창 부회장님, 한국YMCA전국연맹 허정도 증경 이사장님과 경남애너지 이택수 부사장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도의원, 시의원, 지역 시민단체, 청소년단체, 문화예술단체, 상공인, 출석교회 교우들, 공무원분들도 여러분 오셔서, 이 자리가 더 빛나는 것 같습니다. 한국YMCA전국연맹의 전현직 이학영, 남부원 사무총장님과 전국사무총장협의회 이상점 회장님, 전국간사회 김길구 회장님을 포함하여 전국에서 많은 선후배님들이 오시니 완전히 전국행사가 되었습니다.
80년대 초반 부산YMCA가 운영한 근로청소년교실에서 자원봉사하던 당시의 대학생들, 청년Y 활동을 하면서 지도력을 키운 시민회 분들, 진주YMCA 대학Y 출신들이, 같이 늙어가면서도 모두 와서 더욱 반갑습니다. 창원YMCA 상담원들과 자원봉사자들, 경남지역 7개 YMCA가 그동안 저에게 주신 따뜻한 배려에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저의 퇴임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없는 살림>에도 우짜든지 잘 해 주실려고 애쓰신 창원YMCA 이사님들, 그동안 지혜도 보태주시고 시간과 돈도 후원해주신 덕분에 호강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2002년, 사무총장에 취임하면서 “지역을 섬길 수 있는 마지막 현장이라는 생각으로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제 나름대로는 지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동안 저랑 호흡을 맞춘 차정인 현 이사장님과 9년 전에 진주에 있던 저를 창원으로 불러 주신 박양동 증경 이사장님, 회관건축을 위해 함께 동분서주하신 이승창, 김상규 증경 이사장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말로만 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코 끝이 찡해오는 부산, 진주YMCA와 창원YMCA에서 나랑 함께 생활했던 모든 직원들도 고마워. 어떨 때는 밀린 월급 때문에 밤잠을 설친 적도 있었고 성질 때문에 잘해주지도 못한 것 같구먼. 함께 지낸 시간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70년대가 생각납니다. YMCA에 들어오기 전이었습니다. 체포, 구금, 수색, 고문, 징역, 협박, 공갈, 회유, 유혹, 억압등의 단어들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던 암흑기, 희망보다 절망과 패배감이 많았던 시절을, 피끓는 20대로 지낸 것은 지금 생각해 보니 큰 다행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별로 훌륭한 사람도 아닌데 시대를 잘 타고나서 조금이나마 민주화에 역할을 할 수 있었고 험한 과정을 지내오면서 스스로를 단련시킬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후 80~90년대에는 오로지 YMCA를 통하여 시민운동을 해오면서 “불의는 용납하지 않으면서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문제, 원칙은 지키면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부드러운 직선”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해온 편입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도 뒤돌아보니 이런저런 일이 생각납니다. 잘한 일도 있고 잘못한 일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면서 교만할 때도 있었습니다.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확신이 부족해서 마음이 흔들리거나 겁날 때도 있었습니다.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제대로 도움을 주지 못해서 안타까울 때도 있었고 자신의 부족함을 느낄 때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운동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두가지 덕분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유신시절에 보낸 20대의 청년, 전점석입니다. <지난 날의 꿈이 나를 밀어간다>라는 시집 제목처럼 20대의 생각과 경험이 중요했습니다. 또하나는 가족입니다. YMCA 30년은 결혼 30년입니다. 고맙게도 가족들이 모두 심각한 병으로 입원하거나 수술 받아 본 적도 없었고, 애들 둘이 모두가 속 썩이는 일도 없었고, 재수하지도 않고, 국립대학교에 진학하고, 대학졸업 후에 곧바로 취업도 했습니다. 제가 지역 일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복이 많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일복도 많고,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고, 돈도 필요한 만큼은 그때그때 마련되어 온 것 같습니다. 건축 모금할 때를 생각하면 정말 고마운 분들이 많습니다. 그동안 보여주신 과분한 격려와 협력에 감사드립니다. 범사에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와서 보니 평소에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정말 저는 후배들을 잘 만난 것 같습니다. 제가 술을 많이 사지도 않았는데...... 제가 없는 자리에서 점박이 형님이라고 흉보는 후배들이 큰 힘입니다.
하여튼 저는 인덕(人德)이 정말 많습니다. 제가 근무했던 곳이 두 군데인데 부산, 진주YMCA에서 오늘, 많이 오시고, 제가 처음으로 YMCA에 들어 올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고 평간사 시절에 사무총장으로 모셨던 임신영 선배님께서 오시고, 창원YMCA로 불러주셨던 박양동 이사장께서도 오셨으니 이 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퇴임한다는 게 소문이 나니까 후배들은 벌써 세월이 그렇게나 흘렀나라는 반응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늙어간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는가 봅니다. 언론에서도 크게 관심을 가져줬는데 인터뷰를 하면서 정말 퇴임시기를 잘 정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섭섭할 때가 가장 적기인 것 같습니다. 밥 먹을 때도 조금 더 먹고 싶을 때, 숟가락을 놓는 것이 제일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앞으로 뭘 할 것인지를 물으면서 이제껏 고생했으니 앞으로는 돈을 많이 벌라고 충고해주시는 분들도 있는데 어디 송충이가 멀리 가겠습니까? 할 줄 아는 것도 몇 가지 안되는데....... 계속해서 솔잎을 먹을려고 합니다. 다만 방법적인 측면에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 둘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겨레신문에 난 인터뷰 기사를 보고 대뜸 저에게 <우산(愚山)>이라는 호를 선물한 친구가 있어서 더더욱 달라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고마운 분들에게 진 빚을 갚는 길은 이제껏 살아온 방향으로 계속해서 더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창원YMCA 이사와 직원께는 부담을 드린 것 같아서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든든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계속해서 힘을 보태겠습니다. 오늘 오신 분들께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YMCA 운동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참여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1. 3. 22 전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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