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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야할 근대문화유산

주민의 노력으로 동네역사를 보존한다.


 

주민의 노력으로 동네역사를 보존한다.


전점석 사무총장(창원YMCA)


 지난달에 인천에 있는 달동네박물관에 다녀왔다.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가면서 70~80년대의 대표적인 판자촌이었던 이 동네의 역사가 궁금하였다. 창원에서 최근에 철거된 성주동과 가음정동을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철거하고 새로 시작하는 현재의 재개발방식에 대한 올바른 대안을 찾고 싶었다. 창원공단이 조성되기 전에는 마치 아무도 살지 않았던 곳처럼 과거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몇몇 동네에서 기념비석과 노거수를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모두들 안타까워하는 일이다.

 수도국산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송현동이다. 개항기이후의 강제이주로 인하여 조성되기 시작하였으며 6.25전쟁 때의 피난민과 60~70년대 산업화시기의 이농민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3천여 가구의 모듬살이가 있었던 곳이다. 1999년에 철거된 이곳은 고층아파트로 재개발되었는데 다행히 2005년에 동구청에서 박물관을 건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달동네 서민의 생활상을 주제로 한 체험중심의 근현대 생활사 전문박물관이다. 비록 크지는 않지만 의젓이 입장료까지 받고 있다. 내가 구경하고 있는 동안에도 가족과 함께 오기도 하고 젊은이들이 신기하다는 모습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설명해주시는 분에 의하면 하루에 500명이상의 관람객이 올 때도 있으며 각 학교에서 단체관람을 많이 온다고 한다.


 1층 입구를 들어서니까 산동네의 좁은 골목이 나타났다. 영화 세트장과 같은 모습인데 중요한 것은 상상의 골목이 아니고 철거되기 전에 실제 있었던 골목을 당사자의 동의와 협조를 얻어서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골목입구에는 유리로 만든 작은 진열장이 있는데 1969년 4월 17일자의 동아일보가 붙어있고 철거될 당시의 몇몇 집에서 뜯어온 벽지도 진열해놓았다. 구일 SEIKO라고 적힌 벽시계, 문패, 털신, 수도꼭지까지 모아놓았다. 1983년에 발행한 주민등록증, 4288년에 발행한 경기도 도민증, 연탄구매권도 있었다. 심지어 이 동네에서 실제 운영중이었던 대지이발관에서 사용한 이발도구와 사진도 있었다.


진열장 옆에서는 철거민 몇몇분들이 회고하는 이 동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를 감상할 수 있었다. 초가집 뒤뜰의 개나리 꽃 이야기, 산 꼭대기에 하나밖에 없는 수도가 있는 집에서 항아리에 물을 길러서 채운 이야기, 산비탈 흙길을 비 올 때 걷던 기억, 공동수도, 공동변소생활, 공무원이 오면 전등을 감추었던 기억을 회고하였다. 감춘 이유는 전기사용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달동네 집짓기에 대해서는 슬레이트, 루핑, 판자, 콩댐장판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골목양쪽의 집은 철거 전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낯익은 전봇대와 가로등, 전깃줄이 있었으며 슬레이트 지붕과 시멘트 벽, 창문, 출입문짝도 실제 사용했던 것들이다. 벽면에는 분필로 적은 게 분명한 흰색의 <빵구>라는 글자, 관공서에서 스프레이로 적어놓은 빨간색의 <멸공>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오른쪽 편 골목입구에는 뻥튀기 기계가 놓여있었다. 골목 첫째 집은 은율 솜틀집이다. 간판과 출입문도 옛날 그대로이다. 주인이 황해도 은율에서 피난오신 분인데 그분의 동의를 받아서 솜틀 기계를 그대로 갖다놓았다. 사용했던 대나무바구니도 놓여있었다. 연탄가게 안에는 연탄과 지게 그리고 외상거래가 적혀있는 작은 칠판이 걸려있었다. 대지이발관은 지금이라도 이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래된 라디오와 손금고, 사용했던 빗, 바리캉, 면도칼, 그리고 가죽끈도 달려있었다. 가죽끈의 끝부분을 손으로 잡고서 면도칼의 날을 세우던 장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 집 주인은 지금도 인근에서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구멍가게 안에는 실타래, 대한성냥, OB맥주, 해태 빠다카라멜, 하이타이, 푸른색의 대나무 비닐우산, 풍선, 건빵, 생과자, 아이스께끼통, 승리양초, 미원 등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어릴 적에 사용했던 것들이었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니까 여러 개의 단칸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아마 혼자서 자취생활하면서 직장을 다녔을 것 같았다. 누런 종이로 도배한 방도 있었고 신문지로만 도배해놓은 방도 있었다. 구석진 곳의 자투리 공간에는 장독대가 있었고 나무판자로 만들어놓은 두 칸짜리 공동변소에는 자그마한 빨간 전구가 켜져 있었다. 골목에서 창문으로 넘어다볼 수 있는 방안에는 철가방위에 솜이불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곳도 있고 호마이카 밥상이 차려져있는 곳도 있었으며 앉은뱅이 책상과 연필, 필통이 보이기도 하였다. 어느 방에서는 가족 4명이 둘러앉아서 통성냥의 윗부분에 제조회사인 <대한성냥> 라벨을 붙이고 있었다. 당시의 생활상을 그대로 만날 수 있었다.

 골목 안쪽 벽에는 <최근의 북한괴뢰 무장간첩 만행에 즈음하여> 라는 제목의 담화문이 붙어져있는데 내무부 장관 이호와 국방부 장관 김성은의 공동명의로 되어있었다. 어느 방안에는 차지철씨가 국회의원일 때에 주민들에게 나누어준 달력이 벽에 붙어있었다.

 골목 끝머리에는 작은 마당이 있는 ㄷ자형 주택이 있었다. 이 집이 실제로 가장 부자였다고 설명해주었다. 온갖 살림살이가 다 마련되어 있는 부엌에는 천정에 꽁치묶음이 매달려있고 부뚜막에는 젖은 운동화를 말리고 있었다. 대나무 소쿠리와 조리, 국자가 벽에 걸려있었다. 마당에는 양철 다라이에 하이타이를 풀어서 빨래감을 넣어두었고 빗자루가 세워져 있었다. 자그마한 방에 옛날 교복이 5~6벌 걸려있고 출입문에는 <체험, 교복입어보기>라는 팻말이 붙어져 있었다. 어느 젊은이는 직접 입어보면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기념품 가게가 나타났다. 바로 앞에는 비디오를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앉을 수 있는 평상이 있었다. 옆에는 수십 권의 만화책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평상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자기 동네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박물관이 있다는 게 신기하였다. 이곳은 동구청 공무원들의 노력과 달동네 주민들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만들 수 있었겠지만 보다 더 중요한 동력은 바로 송현동 철거 주민대책위원회의 줄기찬 노력이었다. 90년대 말에 대책위원회는 <현지주민 몰아내는 개발정책 철폐하라!>, <송현주민 단결했다, 주택공사 각오하라!>는 구호를 부르짖으면서 반대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행한 <수도국산 철거민들>이라는 제목의 회보도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분들이야말로 달동네박물관을 만든 주역이다. 훌륭한 것은 철거반대활동에서 그치지 않고 한 발짝 더 나아갔던 것이다. 자기 동네의 역사를 간직하는 것은 결국 주민의 역할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