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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녹색교통

버스안 풍경


비가 세차게 내리던 금요일 오후,

은행에서 볼일을 보고 버스에 올랐다.

종점까지 가야 했던 난 제일 뒷자리에 앉았는데,

바로 내 앞 좌석에 앉은 두 소년이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잠시 뒤 한 친구가 내리고 내 바로 앞 소년만이 남게 되자 그제서야 조용해 졌다.

몇 정거장 지나 할머니 한 분이 힘겹게 차에 올랐다.

뒤따라 사람들이 하나 둘씨 차에 오르는 동안

할머니는 안절부절 못하며 앞쪽에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내 앞에 있던 소년이 일어섰다.

'아까 친구와 하는 얘기로는 내리려면 멀었는데. 벌써 내리나?' 싶어

괜한 궁금함에 소년을 지켜 봤다.

소년은 앞으로 가 할머니를 모셔 오더니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내드렸다.

할머니는 자리에 앉자 마자 보따리에 무언가를 꺼내 소년의 손에 쥐어 주었다.

"딸이 사 줬는데, 별루 맛이 없어. 어때? 맛있지? 역시 딸이 최고라니깐"

할머닌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면서도 무척 기뻐하셨고,

손주 같은 소년을 옆에 세워 두고 이런저런 얘길 하셨다.

그러는 사이 소년은 내릴 곳을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소년은 그 사실을 깨닫고 잠시 멈칫하는 듯했지만

차마 할머니의 말을 끊을 수 없었던지 그대로 할머니와 함께 종점까지 갔다.

소년은 할머니를 부축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뒤따라 내리던 나는 둘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학생은 어디까지 가? 이 정신없는 노인네는 내릴 때를 지나쳤구만."

그러자 소년도 "저도 몇 정거장 더 왔어요"하고 말했다.

결국 그들은 마주보고 웃다가 돌아 나가는 버스에 또다시 나란히 올랐다.

그들이 또 반대편 종점까지 가지 않길 바라며 난 사무실로 들어왔다.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답다고 느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서영이 할머니는 한 달에 한 번 고아원에 가셨다.

그 고아원은 할머니가 태어나신 고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고아원에 가는 날이면 할머니는 전날부터 엄마와 함께

아이들에게 줄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셨다.

과자나 과일도 준비했지만 언제나 빠지지 않는 음식은 떡이었다.

그래서 고아원 아이들은 서영이 할머니를 '떡 할머니' 라고 불렀다.

서영이도 가끔 할머니를 따라 고아원에 갔다.

아이들과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서 서영이는 할머니에게 묻곤 했다.

"할머니! 아이들은 왜 고맙다는 말도 안하지?

할머니가 맛있는 음식을 해다 주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사람들한테 늘 받기만 해서 그런가봐?"

"서영아 그렇지 않아. 아이들은 고맙다는 표현을 하는데 익숙하지 못할 뿐이야.

사랑을 받지 못하고 큰 아이들이라서 그래. 가엾은 아이들이야."

"그래도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왜 고마운 걸 모르겠니? 하지만 사랑은 강물 같은 거란다.

흐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강물은 여전히 흘러 가거든...,

할미는 조그만 아이들의 눈빛을 보면서 사랑과 감사를 느낄 수 있는 걸."

서영이는 할머니의 말을 다 이해할수 없었다.

하지만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남한강 줄기를 바라보며

할머니가 했던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어보았다.

"사랑은 강물 같은 거란다.

흐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강물은 여전히 흘러가거든."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서영이 할머니는 거동을 못하셨다.

할머니는 고아원에 가시지 못 하는 걸 가장 마음 아파하셨다.

아카시아 꽃이 피어날 무렵, 할머니는 평생 지니고 다니시던

조그만 십자가를 손에 꼭 쥐고 평화롭게 눈을 감으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해 가을, 서영이는 할머니 산소에 갔다.

할머니는 할머니가 태어나신 고향 뒷산에 잠들어 계셨다.

서영이는 마을 입구에서부터 눈물을 글썽이며

할머니가 누워 계신 언덕까지 올랐다.

그런데 할머니 산소 앞에 도착했을 때, 서영이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 산소 앞에는 삼십 개도 넘어 보이는

조그만 박카스 병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조그만 병들마다 형형색색의 들꽃들이 물과 함께 담겨져 있었다.

시들어버린 꽃들도 있었지만,

꽂아 놓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싱싱한 들국화들도 있었다.

들깨만한 개미들이 줄을 이는 햐얀종이 위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고마운 떡 할머니. 떡 맛있게 드세요. 몇 밤 자고 또 올게요."

"할머니는 하늘 나라에서도 아이들에게 떡을 만들어주시겠죠?"

"우리도 할머니가 해주시던 맛있는 떡이 자꾸만 자꾸만 먹고 싶은데...,"

서영이 눈가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할머니를 잊지 않고 한 시간을 넘도록 걸어서

할머니 산소에 다녀가는 아이들의 사랑이 너무 고마웠다.

아이들이 손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걸어왔을

먼길을 내려다보는 서영이 눈가로 자꾸만 눈물이 맺혔다


연탄길 2부 / 이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