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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환경 건축,도시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 감응의 건축, 현실문화연구 출판 : <사람 건축 도시>, <서울이야기>에 이은 정기용의 세 번째 저작·작품집. '공간의 시인'이라 불리는 건축가 정기용이 1996년부터 2006년까지 만 10년 동안 무주에서 진행한 크고 작은 공공건축물 30여 개 프로젝트(건축, 리노베이션 등)에 대한 정리와 체험을 풀어냈다. 건축물 각각의 배치도, 조감도, 완공 전후의 사진뿐만 아니라 현재 주민들이 건축물을 사용하는 모습, 건축가가 무주 땅과 감응하게 되는 사연에서부터 설계하기 전의 스케치까지 들어 있어 무주 프로젝트의 전 건축활동 과정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다. 책의 말미에는 강내희, 김봉렬, 조성룡, 박원순 등이 무주 프로젝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비평, 공공건축의 전망을 짚어보는 좌담회를 실었다. 또한 지역주민들은 무주 프로젝트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으며, 낯설었던 '서울 건축가 정기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인터뷰 형식을 통해 밝히는 글을 수록했다.


1. “나 안성면이 한반도에 남은 마지막 땅인데 너 잘 만났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나를 좀 잘 지켜다오!” : 감응의 건축, 감응의 풍경 그리고 오래된 미래를 위하여 : 1996년 정기용은 강내희 교수 등과 함께 구미를 시작으로 ‘국토순례’를 시작했다. 구미를 거쳐 안동을 지나 무주의 안성면에 이르렀을 때, 정기용은 안성땅과 ‘감응’을 하게 된다. 그 순간을 정기용은 “나 안성면이 한반도에 남은 마지막 땅인데 너 잘 만났다”라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나를 좀 잘 지켜다오!”라고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등나무운동장: 사람과 사람, 건축가와 자연의 ‘감응’

“여보게 군수, 우리가 미쳤나! 군수만 본부석에서 비와 햇볕을 피해 앉아 있고 우린 땡볕에 서 있으라고 하는 게 대체 무슨 경우인가. 우리가 무슨 벌 받을 일 있나? 우린 안 가네.” 무주 군수가 ‘왜 공설운동장에서 행사가 있을 때 참석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어느 노인이 한 대답이다. 노인의 말에 ‘감응’한 군수는 운동장 주변에 등나무 240여 그루를 심어서 스탠드에 자연스러운 그늘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허공을 허우적대는 등나무 순에서 ‘감응’을 받은 건축가는 식물이 초대되는 집이 아니라 ‘식물이 주인’이 되는 집이 되게끔 배려하는 건축으로 화답한다. 사람과 사람(지역주민-군수, 군수-건축가)이 서로 ‘감응’하고, 사람과 식물(건축가-등나무)이 서로 ‘감응’해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등나무운동장의 실현을 본 것이다.

“영혼을 위한 밝은 집” 무주 추모의집(무주 공설납골당): 인삼밭에서 ‘감응’을 받다

정기용은 산 자가 죽은 자를 기억하는 장소인 납골당을 건축하기 전 ‘죽음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고민을 하게 된다. 고민 끝에 결국 그는 “한국의 근대사는 죽음의 역사, 아니 특별하게 ‘죽음을 죽인 역사’다”라는 결론에 이른다. 정기용은 “죽음을 죽인 사회에서 죽음을 현실의 공간으로 불러와 산 사람들과 마을과 주변의 경관과 일상적으로 관계 맺을 때, 죽음은 삶의 곁으로 돌아올 수 것”이라면서, 무주 공설납골당을 ‘영혼을 위한 밝은 집’으로 설계하기로 한다. 그러던 중, 무주 끝 동쪽 언덕 공동묘지 사이로 보이는 인삼밭에서 ‘감응’을 받은 정기용은 인삼밭이 자신이 설계하려는 납골당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모든 식물은 태양을 보며 자라는데, 인삼은 양지의 반대가 되는 그늘 속에서 자란다는 역설적인 사실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무주 공설납골당은 ‘옛날 뒷동산의 묘지들처럼 삶과 끈끈한 관계가 있는 납골당’, ‘영혼을 위한 밝은 집’이 되었다.

이야기가 기다리는 버스정류장 : 존재의 힘, 풍경의 힘 그리고 그 둘의 ‘감응’

정기용은 무주의 버스정류장을 힘 있게 존재하게 하면서도, 그 정류장을 주변과 관계를 맺게 해 당당하면서도 조화롭게 전체 풍경의 일원이 되도록 건축했다. 버스정류장은 하찮은 기다림의 공간이 아니라 삶이 머무는 장소이고, 그래서 버스 정류장은 작지만 주변의 풍경과 맞설 뿐만 아니라 공존하는 건축적 지혜가 요청되기 때문이다. 도심과 무주 버스정류장의 가장 큰 차이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서로 친밀하게 연결해 주는 ‘근접성’에 있다. 도심 버스정류장의 일자형 가로 의자와는 달리, 무주의 버스정류장은 의자가 ‘ㄱ’자여서 사람들이 나란히가 아니라 마주 앉게 되어 서로의 시선이 은근히 교차되고 낯선 사람끼리도 “어디까지 가십니까?”라고 묻지 않을 수 없는 ‘관계’를 만든다. 우연히 같은 공간에 있게 된 사람 간에 ‘관계’를 적절히 만들어 ‘감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2. “면사무소는 뭐 하러 짓는가? 목욕탕이나 지어주지” : 지역 주민을 위한, 지역 주민에 의한 공공건축, 그리고 지속 가능한 도시의 실현

면사무소의 종말: 주민자치센터 혹은 면민의 집의 탄생

농촌지역의 면사무소는 주민들의 자율성과 지역성을 보장해 주는 행정기관이기보다는 중앙정부의 시책을 하달하고 집행하는 수족에 불과했었다. 이러한 면사무소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도시화로 인구가 도시로 빠져나가는 것이 한계점에 이르렀을 때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다. 무주의 면사무소프로젝트들은 바로 그런 시기, 즉 행정기구로서의 면사무소가 아니라 ‘지역 주민을 위한, 지역 주민에 의한 공간’으로 면사무소를 전환시켜야 할 시점에 시작되었다.


주민들에게 귀를 기울이다: 목욕탕이 딸린 주민자치센터

면사무소 공간 재편의 대전제는 행정서비스의 충족과 지역주민을 위한 공공공간의 확보지만, 그 중요도와 우선순위에서는 결정된 게 없었다. 특히 인구구성비에서 노인층의 비율이 압도적인 지역의 경우, 실질적으로 이들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따져보아야 했다. 정기용은 안성면사무소를 건축하기 전 우선 주민들이 절박한 것을 찾아나섰고 그중에 공중목욕탕 시설이 최우선임을 알게 되었다. 모든 안성면 주민들은 하나같이 “면사무소는 뭐 하러 짓는가? 목욕탕이나 지어주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주민자치센터(면민의 집) 프로그램으로서 공중목욕탕은 주민들이 요청한 것이고, 건축가가 그에 따른 것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지방자치단체와 건축가들이 귀담아들어야 하는 공공건축의 한 단면이다.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할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공간을 마련해주고, 지역의 정체성을 찾아 지역에 거주하는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갖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지역의 공공건축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럴 때만이 지속 가능한 도시가 실현될 것이다.

하늘의 별과 마을을 연결해 지역의 정체성을 만들다: 부남면의 ‘별 보는 집(천문대)’

부남면에서 정기용은 서로 떨어져 있는 두 건물인 면사무소와 복지회관을 기능적으로 연결하며, 두 건물만이 아니라 부남면사무소의 장소성을 새롭게 만들어내기 위해 ‘별 보는 집(천문대)’를 건축한다. 오지 중의 오지 마을에 생겨난 천문대는 부남면 주민에게 마을의 정체성을 갖게 해주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땅에 그 지역이 갖는 청정한 힘을 빌려 하늘의 별과 마을을 연결해 그 마을을 우주와 소통하게 해준 것이다.

이밖에 정기용은 무주 군청 리노베이션, 재래시장, 청소년수련관, 곤충박물관, 향토박물관, 농민의집, 된장공장, 보건의료원, 종합복지관, 노인전문요양원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3. “그런데 선생님께서 무주같이 작은 지방자치단체의 건축 일도 하실 수 있겠습니까?” : 소셜 코디네이터(사회적 조정자)로서의 건축가

공공건축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 설계된 것이다. 이는 공공건축이 본질적으로 좀 더 높은 보편성을 요구함을 의미한다. ‘보편성’이란 특정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보다 큰 다수를 배려함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또한 어떻게 ‘지역성’을 반영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정기용은, 현대의 건축가는 ‘소셜 코디네이터(사회적 조정자)’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건축가는 단순히 집(건물)을 설계하고 짓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 땅이, 그리고 시대정신이 원하거나 거부하는 것을 찾아내 조화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기용은 위대한 건축가도 있지만 다원화하고 복잡해진 사회의 수많은 이슈와 문제점을 건축가의 상상력만으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에, 건축가가 세상을 읽고 땅을 읽고 진정 사회가 요청하는 것에 대해 답하려면 수많은 분야를 코디네이팅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무주 공공건축 프로젝트, 1996~2006, 무주, 건축가 정기용: 행운이자 고난의 행군 : 정기용은 ‘공공건축가’로서 첩첩산중, 내륙의 작은 도시에서 1996년부터 만 10년 동안 크고 작은 공공건축물 설계작업에 매달렸다. 그는 무주 프로젝트를 “행운이면서 동시에 고난의 행군”이었다고 회상한다. 행운이면서 고난의 행군이기도 했던 무주 프로젝트는 우리나라에서 공공건축 이론과 그 실천,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유용한 첫 참조사례로서 의미가 크다. <감응의 건축>은 공공건축을 향한 한 건축가의 고답적 작품집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을 위한 책으로 자리할 것이다. 

(위클리 경향, 2010. 12. 14 에서 일부 가져옴) 현재 정기용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있는 정재은 감독(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감독)은 정기용이 만든 기적의 도서관 속에서 사람들이 그 공간을 어떻게 즐기는지를 영상에 담았다. 도면이나 모형으로는 짐작할 수 없는 생생한 공간의 모습이 영상을 통해 다가온다. 전북 무주에서 10여년간 공공건물 30여채를 지은 무주프로젝트의 일부인 무주 버스정류장도 전시장 내부에 설치물로 재구성됐다. 정류장에는 그 곳에서 버스를 타고 지나갈 때 보게 되는 주변 풍경 영상이 마치 실제로 버스를 타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상큼한 음악과 함께 흘러간다. 건축가가 그러한 풍경에 어울릴, 그런 풍경을 보며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고려한 버스 정류장을 지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